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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운의 히코노미] 한때는 악덕 자본가 말년엔 자선 사업가…美의 영원한 철강왕

헤드라인 2025-10-26 07:57 매일경제 원문 보기
美산업 뼈대 세운 카네기 얼굴엔 주름이 가득하고, 머리에는 세월의 서리가 내려앉아 백발이 성성하다. 손주를 봐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지천명의 나이 50세. 겉모습과는 달리 사내는 이제 막 결혼을 준비하는 예비신랑이었다. 사업에서 일가(一家)를 이룬 그는, 이제 어엿한 가정을 준비하려 했다. 신붓감은 스무 살이나 어린 참한 여인. 주변을 모두 아우르며 6년간 그의 옆을 지키면서 몸과 마음을 헤아려준 고마운 사람이기도 했다. 마침내 찾아온 청혼의 순간. 결혼 약속과 함께 남자가 들이민 건 '계약서'였다. "남편의 재산을 상속받지 않겠다"란 내용의 상속 포기 각서였다. 배신감에 사로잡혀 울분을 토하며 따귀를 때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자는 조용히 펜을 들고 종이에 서명했다. 남자의 재산이 귀한 데 쓰인다는 걸 알아서였다. 그의 고귀한 뜻을 존중해서였다. 오늘날 '제국' 미국의 밑그림을 그리고, 그 신이 내린 막대한 부(富)를 수천 개 도서관으로 환원한 남자.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의 이야기다. 카네기 부부. '원석'으로서의 카네기 모든 철은 한때 거칠기 짝이 없는 '원석'이었다. 카네기도 그랬다. 그는 1835년 스코틀랜드 던펌린에서 가난에 찌든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직업은 수공 방직공. 한때 돈을 좀 만지던 시절이 있었지만, 물밀듯이 밀려오는 기계에 의해 일자리를 빼앗긴 가련한 처지였다. 빵 한 덩이와 감자 한 조각이 귀한 시절이었다. 가난이란 때론 자유를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어서, 아버지 윌리엄은 미국행 배를 탔다. 그 시절 미국은 빵과 자유의 나라, 유럽의 가난한 자들이 원하는 모든 것이 있는 나라처럼 보였으니까. 콩나물시루처럼 사람으로 빽빽한 배에서 몇 주간을 견뎌야 하는 고단한 처지를 버틸 수 있었던 건, 마음껏 빵을 먹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어서였다. 그러나 미국 펜실베이니아 앨러게니에 도착한 그들을 맞이한 건 빈곤의 비린 내음이었다. 먹을 것이 없어 배를 부여잡은 아이들과 하루 벌이를 술을 먹는 데 사용하는 고주망태인 가장들이 풍기는 냄새였다. 스코틀랜드에서 맡던 그 냄새 그대로였다. 그럼에도 미국이 고향 땅보다 한 치라도 나았던 건, 그곳에는 적어도 '일자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열네 살의 카네기에게도 일자리 제안이 들어올 정도였으니까. 방직 공장의 지하실에서 보일러를 관리하는 잡일 담당 '보빈보이'였다. 주6일 하루 12시간 중노동의 대가는 고작 1.2달러였다. 부서지지 않는 카네기 용광로 속에서 어떤 돌은 부서지지만, 어떤 돌은 더 강해진다. 우리는 살아남는 돌을 '철'이라 부른다. 카네기가 그랬다. 거친 노동에 던져진 소년은 조각나지 않았다. 남들보다 일찍 출근하고, 남들보다 오래 자리를 지켰다. 노동이 고될수록 카네기의 순도는 높아졌다. 보빈보이로 일하던 카네기는 1년 만에 피츠버그 전신회사의 사무 보조원이 됐다. 급여가 더 높고, 그만큼 일머리가 필요한 직업이었다. 전보를 배달하던 소년은 남다른 감각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훔쳤다. 중요 인물들의 얼굴과 이름을 빠짐없이 외웠고, 주요 고객의 위치를 모두 머릿속에 담았다. 1년 만에 관리자로 승진했다. 짬이 날 때는 책을 집어들었다. 맨해튼 국립은행 초대 사장이었던 제임스 앤더슨은 지역 아동들에게 자신의 도서관을 개방했다. 일이 끝날 무렵 카네기가 향한 곳이었다. 부는 앤더슨처럼 쓰는 것이라고 스스로 되뇌었다. 안목이 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카네기를 탐냈다. 그만큼 계산이 정확하고, 정세를 파악할 줄 아는 인물이 없어서였다. 펜실베이니아 철도회사의 토머스 스콧은 10대의 그를 비서로 고용했다. 6년 후 서부 지부의 총감독관을 맡겼다. 연봉은 세 배가 뛰었다. 카네기에게 노동은 운동과 같은 것이어서, 연차가 쌓일수록 그의 경영 '근육'은 두툼해졌다. 재무, 고용, 물자 조달, 비용 관리, 경영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펜실베이니아 철도에서 카네기는 '철의 맛'을 알았다. 당대 가장 유망한 산업인 철도에 필수적인 자재여서였다. 시대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카네기가 철강 산업에 눈을 돌렸다. 제 사업으로 큰 부를 일구겠다는 꿈이 그의 마음속에 움텄다. 카네기의 기부금이 노동자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풍자하는 만평. 지독한 경영 능력을 뽐내다 남들처럼 생각하면 남들처럼 살 수밖에 없다는 걸 카네기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카네기는 더 싸고 강한 강철을 만들고 싶었다. 읽고, 묻고, 사람을 만나며 길을 찾았다. 마침내 영국에서 개발된 '베서머 제법'이란 신공법을 발견했다. 뜨거운 용광로에 공기를 불어넣으면 불순물이 날아가고 생산량이 늘어나는 신기술이었다. 미처 미국까지 들어오지 못한 기술이었다. 카네기는 이곳에서 기회를 포착했다. 1865년 카네기가 강철 압연 공장을 열었다. '철강왕'의 첫발이었다. 카네기는 철강을 무지막지하게 쏟아냈다. 강철 가격을 절반으로 떨어뜨릴 정도였다. 다른 철강회사들이 가격 경쟁에 무너져갔다. 미국이라는 제국이 카네기라는 철강왕에 의해 지어지고 있었다. 파괴적 혁신가는 대개 자비와 거리가 먼 사람들인데, 카네기가 그랬다. 무자비한 가격 경쟁으로 경쟁자의 숨통을 끊어놓고, 염가에 그 기업을 인수했다. 정경유착도 서슴지 않았다 정치권에 줄을 대는 것에도 개의치 않았다. '의형제'와 다름없는 펜실베이니아 철도 경영자인 스콧으로부터 일감을 따내 수익 기반을 다진 뒤 카네기는 의회에 돈을 수시로 먹였다. "미국 철강 제품을 보호하기 위해 관세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서였다. '자국 산업 보호'라는 미명하에 숱한 법이 통과됐다. 수혜자는 언제나 카네기였다. 1889년 미국의 강철 생산량이 영국을 넘어섰다. 영국에서 시골 촌뜨기로 불리던 카네기는 이제 어엿한 미국의 '철강왕'이었다. 카네기라는 원석이 '아메리칸드림'이라는 제련 과정을 거쳐 강철이 됐기 때문이었다. 카네기의 경영 스타일은 거친 짐승과 같았다. 경쟁자뿐만 아니라 노동자에게도 송곳니를 드러냈다. 인건비는 언제나 억눌러야 하는 것이었고, 노동조합은 회사, 더 나아가 나라의 적이었다. 편견은 그의 명성에 흠집을 남겼다. 펜실베이니아주 홈스테드 카네기 철강 공장에서 파업이 일어난 것이었다. 143일간 지속된 미국 역사상 가장 끔찍한 노사 갈등, 홈스테드 파업이었다. 갈등의 끓는점이 임계에 달하자 카네기는 고향 스코틀랜드로 여행을 떠났다. 뒷일은 파트너 헨리 클레이 프릭에게 맡겼는데, 그는 대표적인 '반노조' 인사였다. 임금 인상을 요구한 노조에 프릭은 외려 22% 임금 인하 카드를 들이밀었다. 파업은 자명한 것이었다. 프릭은 공권력을 동원했다. 주 민병대 2개 여단이 공장을 에워쌌다. 노동자 7명과 진압대원 3명이 죽고 수백 명이 다쳤다. 미국 전역의 노동자들에게 '카네기'란 이름은 '악마 자본가'의 상징이었다. 카네기의 후원을 통해 만들어진 뉴욕 음악 공연장 '카네기홀'. 경영자에서 철학자로 경영의 풍파에 지쳤기 때문이었을까. 세간의 비난에 생채기가 났던 것일까. 카네기는 철학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천문학적인 돈을 가졌지만, 마음은 헛헛하고 공허했다. 제임스 앤더슨이라는 사내의 이름이 떠올랐다. 아무것도 없는 자신에게 기꺼이 도서관을 열어준 남자. 때가 꼬질꼬질한 아이들이 책을 읽는 모습에 미소를 짓던 부자. 카네기는 결심했다.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미국 아이들이 지적 갈증을 해갈할 지식의 샘을 만들겠다고. "부유한 사업가의 삶은 두 부분으로 구성돼야 합니다. 첫째는 부를 모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 부를 자선으로 분배하는 것입니다. 자선은 삶을 가치 있게 만듭니다."(앤드루 카네기 '부의 복음') 1901년 카네기는 중요한 미팅을 앞두고 있었다. 상대는 존 피어폰트 모건.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은행가였다. 우리에겐 JP모건으로 알려진 사내였다. 철강왕과 금융왕의 만남은 철강 산업을 모건에게 넘기기 위해서였다. 그의 철강 산업은 3억345만달러에 팔렸다. 카네기 수중에 남은 돈은 2억2564만달러. 오늘날 가치로 약 12조원에 해당하는 큰 금액이었다. 모건은 철강회사의 이름을 'US스틸'로 지었다. 역사상 최초로 시가총액 10억달러를 넘은 회사였다. 프랑스 라임스에 위치한 카네기 도서관 앞에 그를 기리기 위한 흉상이 세워져 있다. 위키미디어코먼스 이제 자신의 철학을 전 세계에 구현할 시간이었다. 철강왕을 만들어준 '도서관'이 핵심이었다. 카네기는 미국 전역에 도서관을 만들었다. 고향 스코틀랜드 던펌린뿐만 아니라 영국, 캐나다, 뉴질랜드에도 지었다. 세계 전역에 그의 이름을 딴 도서관은 3000개가 넘는다. 경영인으로서 요람이 되어준 피츠버그에는 카네기공과대학을 설립했다. 수백만 달러를 쾌척했다. 음악의 주요 후원자이기도 했던 카네기는 미국 국립음악원 창립에도 돈을 댔다. 뉴욕 음악 공연장에 '카네기홀'이란 이름이 붙은 이유였다. 천문학적인 기부의 배경을 묻는 말에 그는 언제나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돈은 많을지언정 정신적으로 굶주린 백만장자를 잘 알고 있습니다. 제 열망은 정신의 깨달음과 기쁨, 영적인 것들로만 채워집니다." 경쟁자, 근로자의 피비린내를 지우기 위한 부단한 행위였을까. 다시 신의 품에 안기고자 뒤늦은 참회였을까. 1919년 카네기가 폐렴으로 눈을 감았다. 기부 금액은 9조원. 젊어서는 미국의 물질적 밑그림을 그렸고, 늙어서는 미국 전역에 지식의 샘을 팠던 남자. 카네기의 마지막이었다. 누군가는 돌을 던져도, 그가 만든 지식의 샘은 여전히 미국을 지키는 기둥이 되고 있다. 그가 만든 철강이 미국을 지탱하고 있듯이. 히코노미는 경제라는 어려운 식재료를 역사라는 맛있는 양념으로 요리해드립니다. 독자 여러분의 경제 근육을 키워드리겠습니다.
본문 수집 시각: 2025-10-26 1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