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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태 기자의 책에 대한 책] "난 진정한 모어(母語)를 갖지 못한 언어 고아였다"

헤드라인 2025-10-24 07:30 매일경제 원문 보기
AI 요약

줌파 라히리의 에세이 묶음집 '나와 타인을 번역한다는 것'에서는 번역의 의미와 그 과정에서 느끼는 자아의 복잡성을 탐구한다. 그는 이탈리아어를 선택한 이유를 "난 진정한 모어를 갖지 못한 언어 고아"라는 자각에서 찾으며, 번역을 통해 새로운 문학적 영역을 확장하고자 한 그의 고뇌를 드러낸다. 라히리는 번역이 단순한 언어의 전환이 아닌, 독자가 언어로 만들어낸 경계를 넘어 새로운 세계를 여는 과정임을 강조한다.

퓰리처상 수상 작가가 스스로 영어를 버렸던 이유 하나의 긴 복도를 상상해보자. 시점과 착점으로 이어진 직선의 외길, 저 복도에선 인물이 지나가고 사건이 벌어진다. 영원히. 저 복도는 단순한 길이 아니다. 좌우로 수많은 문이 붙어 있다. 문을 여는 일은 쉽지 않다. 단단히 잠겨 있어서, 너무 좁아 몸을 구겨야만 해서, 안팎의 온도와 조도가 다른 탓에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아서. 문 앞에서 우리가 한없이 망설일 때 우리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끌며, 복도 안쪽으로 안내하는 이들이 있다. 번역가다. 줌파 라히리의 '나와 타인을 번역한다는 것'은 퓰리처상을 수상한 소설가인 그가 번역가로서 집필한 에세이 묶음집이다. 그는 쓴다. "난 자유로움을 느끼기 위해 이탈리아어로 글을 쓴다. 이탈리아어는 단순히 내게 제2의 삶, 또 다른 인생을 안겨주었다." 인도 출신 미국인인 라히리는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집에선 벵골어, 학교에선 영어를 썼다. 하지만 작가적 성공 이후 그는 영어를 버리고 '세 번째 언어'로 이탈리아어를 택했다. 그가 '안전한' 모국어를 완전히 버린 뒤 자신의 문학적 영토를 확장하기로 결심했을 때 세상은 그의 결정을 우려했다. 하지만 라히리의 선택 이면엔 "난 진정한 모어(母語)를 갖지 못한 언어 고아(孤兒)"란 자각이 숨겨져 있었다. 이탈리아어 선택은 저 자각에 대한 자기만의 대답이었다. 다시 말해 라히리의 시도는 '언어적 망명'이었다. "번역한다는 건 한 사람의 언어적 좌표가 달라지는 일, 놓쳐버린 것을 붙잡는 일, 망명을 견뎌내는 일이다." 한 언어 텍스트를 다른 언어로 번역할 때 번역가는 뭔가를 상실한다. 두 언어 간에 완벽한 등가어가 존재하지 않아서다. 번역 과정에서 본뜻은 손상되고, 번역가는 '가장 덜 손상될' 선택을 감행할 수밖에 없어서다. 라히리가 번역을 "수많은 가능성의 폐기"라고 말하는 이유다. 그만큼 번역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저 두려움을 넘어선 자에게만 풍경의 조도는 높아진다. "번역은 수업이 많은 무서운 복도의 어둠 속을 더듬거리며 걸어가는 일이다. (중략) 읽는다는 건, 문자 그대로 책을 여는 것이고 동시에 자아의 일부를 여는 것이다." 그렇다. 번역은 세계와 세계 사이의 아직 보이지 않는 좁은 문을 가장 먼저 여는 일이다. 보이지 않는 외벽에 문짝을 그리고 그때까지 존재한 적 없던 입구를 만들어내는 일. 번역가는 단지 중개자가 아니라 낯선 세계로 향하는 최초의 목격자, 증언자다. 심연에 불을 밝혀 1㎜씩, 1㎝씩 전진하다 복도 끝에 이르고, 조용히 바닥에 놓인 최후의 마침표를 발견한 번역가는 뒤를 돌아보며 비로소 깨닫는다. 익명의 독자들이 내 발자국을 뒤따랐음을, 문장마다 홀로 외로웠으나 혼자인 적은 결코 없었다는 것을.
본문 수집 시각: 2025-10-24 16: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