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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리보와 김치 사이, 유럽과 한국 경계 위에 선 연출가 구자하

헤드라인 2025-10-19 23:59 매일경제 원문 보기
AI 요약

유럽 공연예술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구자하 연출가는 한국과 유럽 사이의 정체성의 경계에서 자신의 작품을 창작하고 있다. 그의 최근 작품 ‘하리보 김치’는 한국과 유럽의 문화가 혼합된 하이브리드 퍼포먼스로,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외로움과 인종차별을 담아내고 있다. 그는 현재 국제 무대에서 대표 아티스트로 활동하며, 새로운 도전을 위해 대형 신작을 준비하고 있다.

유럽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연출가 이방인 경험을 음식·로봇·영상 등 ‘하이브리드 퍼포먼스’로 풀어내 ‘하리보김치’의 구자하 연출가가 서울 혜화동 대학로의 예술가의 집 ‘서울공연예술축제(SPAF)’포스터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서울예술경지원센터] ‘하리보김치’의 구자하 연출가가 서울 혜화동 대학로의 예술가의 집에서 라운드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서울예술경지원센터] “유럽에서 살지만 여전히 저는 한국인으로 소개돼요. 그런데 한국에 오면 또 외국에서 온 연출가처럼 느껴집니다. 저는 그 사이 어딘가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유럽 공연예술계가 주목하는 창작자로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거점으로 하는 구자하 연출가는 최근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그는 2017년 네덜란드 영아트펀드암스테르담(YAA) 재단 예술상(연극·음악 부문)을 받았으며 현재 유럽 공연예술계의 독보적인 프로덕션 하우스 캄포의 레지던트 아티스트로 활동 중이다. 그는 이중의 경계 위에서 살아왔다. 전통적인 연극 형식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예술은 경계를 흐리며 나아가는 역사적 자화상”이라는 믿음 아래 비연극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무대 안으로 끌어들여 왔다. 더 넓은 연극의 형식을 찾아 유럽으로 건너가 10년 가까이 활동했지만, 그곳에서는 여전히 ‘South Korean Artist’로 불렸고, 한국에서는 유럽을 주 무대로 삼은 외부인처럼 여겨졌다. 유럽에서는 아시아 음식을 먹는다는 이유로 냄새에 대한 인종차별을 겪기도 했다. 그는 장르도, 국경도 어디에도 완전히 귀속되지 않았다고 느꼈다고 한다. 지난해 벨기에 초연 이후 이번 서울공연예술축제에서 처음 한국에 소개되는 ‘하리보 김치’는 그러한 삶의 궤적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 작품에 단순한 국경 이동으로서의 ‘디아스포라’가 아니라, 자신이 겪은 이방인으로서의 외로움과 인종차별의 경험을 ‘디아스포릭 스테이트’라 부르는 정체성의 상태로 담았다고 말한다. 연극은 한국의 포장마차를 무대로 음악, 영상, 장어 로봇 퍼포머 등이 어우러진 ‘하이브리드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제목 ‘하리보 김치’는 두 개의 취향에서 비롯됐다. 하나는 태어날 때부터 운명처럼 내재된 ‘김치’, 다른 하나는 베를린 클럽에서 디제잉을 하며 처음 접한 보드카에 적신 ‘하리보 젤리’다. 태생적으로 주어진 것과 살아가며 선택한 것이 함께 섞인 이름이다. 그는 “제 문화적 배경과 정체성, 그리고 제가 경험하며 느낀 것을 가장 원초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게 음식이었다”며 “음식을 통해 내 뿌리와 동시에 내가 가고 있는 길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왜 하필 젤리일까. 그는 “외국에 사는 비유럽인으로서 어떻게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그게 바로 ‘젤리니스(jelliness)’가 아닌가 생각했다”며 “외부의 충격에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흐트러져도 형태를 되찾는 힘을 젤리에서 느꼈다”고 말했다. 이어 “흐려지지도, 완전히 굳지도 않은 그 가운데 — 김치와 하리보의 사이, 바로 그곳이 제 정체성이 머무는 ‘논플레이스(non-place)’라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공연에서는 무대 위 포장마차에 올라 관객 두 명을 초대한다. 오이와 쌈장을 내고 김치전·미역냉국·버섯튀김·젤리를 직접 조리해 건넨다. 유럽에 사는 한국인이 아시아 식품점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손쉽게 만들 수 있는 메뉴를 의도적으로 골랐다. 그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서 연극이라는 매체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도 음악과 영상 작업을 병행해 왔지만, ‘라이브 퍼포먼스’의 감각이 곧 그를 연극으로 이끌었다. 그는 “관객을 극장으로 초대해 그 자리에서 연대를 이루고 정치적 힘을 발현하는 것이 연극의 본질이라 생각한다”며 “음악·영상·텍스트·시노그라피가 함께 어우러지는 완전한 예술 형태가 제가 지향하는 연극”이라고 설명했다. 학교와 현장 모두에서 자신이 지향한 비정형적 연극을 온전히 수용하는 환경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한예종 재학 시절 그는 ‘페스티벌 봄’에서 실험적인 유럽 연극을 보고 “해외에 있을 내 관객을 직접 찾아가고 싶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유학을 떠난 네덜란드의 교육과 현장에서도 “정해진 틀 안에서의 실험”이라는 한계를 체감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라이브 퍼포먼스’로서의 연극을 놓지 않았다. 10년째 국제 연극 무대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그는 이제 세계 각국의 공연 페스티벌에서 ‘대표 아티스트’로 대우받는다. ‘하리보 김치’ 또한 세계 곳곳으로 초청돼 투어를 이어가고 있다. 브라질에서는 할아버지의 김치 레시피를 자랑하며 스스로를 한국인이라 소개한 관객을 만났고, 하노버에서는 무대에 오른 필리핀 출신 관객이 “독일 파견 간호사였다”며 눈물을 보였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김치 디아스포라에 관한 연극”이라 부르며, 도시 간 이동과 생활의 변주 속에서 생겨나는 낯섦과 적응을 ‘디아스포릭 스테이트’로 지목한다. 현재 그는 ‘롤링 앤 롤링’, ‘쿠쿠’, ‘한국연극의 역사’, ‘하리보 김치’ 등 네 편을 병행해 투어 중이다. 서울 공연 이후에는 타이베이, 프라하, 베르겐을 거쳐 내년 2월 퍼스와 도쿄로 향한다. 그는 “이제 저 자신을 증명할 단계는 지났다”며 “제 아티스트 프랙티스를 확장하기 위해 새로운 시도를 앞두고 있다”고 말했다. 2027년 초연을 목표로 대형 신작 ‘본 투 비 케이 투비 팝(Born to be K to be Pop)’을 준비 중이며, 사회운동가·팬덤·K-팝 인더스트리 종사자 등 다양한 참여자를 포괄하는 국제 오디션을 구상하고 있다. “작은 작업을 선호해 왔지만, 더 많은 관객과 만나기 위해 이번에는 규모를 키울 생각입니다.” 그러나 국제 무대에서 대형 연출가로 불리게 된 이후에도 그는 여전히 한국 무대가 가장 떨린다고 말한다. 태어난 곳이자, 가장 비판적인 시선이 모이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한국 관객은 제가 만나온 관객 중 가장 크리티컬한 분들이에요. 보통 투어 때는 긴장을 거의 안 하는데, 이번은 다르죠. 아무래도 모국이니까요.”
본문 수집 시각: 2025-10-20 09:00